도자/화분

[스크랩] 1. 중국 신석기 시대 앙소문화 어문채도

必 霧 2011. 12. 10. 08:56

 

 

중국 신석기 시대 앙소문화(仰韶文化) 어문채도분(鱼纹彩陶盆)

높이 17cm 입지름 31.5cm

 

 

 

 

중국 신석기 시대 대문구(大汶口)문화 팔각성문채도분(八角星纹彩陶盆)    높이 18.5cm   입지름 33.8cm

 

다음 카페 <중국도자기>에서 인용했습니다.

 

 

 

신석기 시대에 화분, 그것도 분재분의 형태에 가까운 화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최소한 중국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분재분 형태로 식물을 심어 기른 것이다. 고기잡이와 농산물의 생산을 위한 기대를 표현한 것인지 신석기 시대의 생산력과 미의식 하에 원시적 원예 및 분재생활을 한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하겠으나 이와 같은 언예 및 분재 행위는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에,  한국 신석기 시대에서도 그 존재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도 뚜렷이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오늘날의 중품에 해당하는 크기여서, 이것이 단순히 한 번 해 본 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관행일 것임을 추리할 수 있게 한다.

 

 

 

중국 신석기 시대 앙소문화(仰韶文化)

중국 황허[]의 중류 지역에서 나타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문화로서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존속하였다. 1921스웨덴 사람인 안데르손(Johan Gunnar Andersson, 1874~1960)허난성[河南省] 싼먼샤시[三門峽市] 민츠현[池縣] 양사오촌[仰韶村]에서 유적(遺蹟)을 처음 발견하여 양사오문화[仰韶文化]라고 불리며, 그 뒤 황허[]의 중류(中流)와 그 지류(支流)인 웨이수이[渭水], 펀수이[汾水], 뤄수이[洛水] 유역에서 1,000여 곳의 유적(遺蹟)들이 발견되었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의 유적은 산시성[陝西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허난성[河南省] 서부와 산시성[山西省] 남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간쑤성[甘肅省]칭하이성[靑海省]의 경계, 남쪽으로는 후베이성[湖北省]서북지방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라오관타이[老官台] 문화의 특징을 계승하여 나타난 것으로 여겨지며, 시대 순서에 따라 반포[半坡] 유형, 먀오디거우[廟底溝] 유형, 반포[半坡] 만기() 유형 등으로 나뉜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는 농경(農耕)을 중심으로 경제 생활이 이루어졌지만, 수렵(狩獵)과 어로(漁撈)도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로 조[],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했으며, 일부에서는 보리나 벼의 재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돼지나 개, 양 등의 사육이 이루어졌는데, 개와 돼지의 뼈에 비해서 양의 뼈는 상대적으로 적게 출토되었다. 실로 뜨개질한 것과 같은 편직물(編織物) 무늬가 새겨진 토기(土器)가 출토되어 편직(編織) 등의 원시 수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해석되며,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양잠(養蠶)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세우는 고상식(高床式) 건축물(建築物) 유적은 곡물창고(穀物倉庫)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양사오문화[仰韶文化] 시대에 농업 생산력이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농지(農地)영속적(永續的)으로 이용하는 집약농업(集約農業)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학계(學界)에서 다양한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농경이나 수렵에는 돌도끼, 돌호미, 돌삽, 뼈삽, 돌가래, 돌낫 등의 간석기골각기 등이 사용되었는데, 석기(石器)의 종류가 쓰임새에 따라 매우 전문화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지닌다. 돌을 갈거나 흙을 구워서 만든 팔찌 등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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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
는 주로 강변의 높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다양한 규모의 촌락(村落)들이 발견된다. 주거지는 대부분 원형(圓形)이나 네모반듯한 방형(方形)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초기에는 원형(圓形)이 많지만 뒤로 갈수록 방형(方形)이 주로 나타난다. 진흙에 풀을 섞어 수혈식(竪穴式)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 부근에 따로 움구덩이를 파서 창고로 사용했다. 다른 부족이나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촌락(村落) 주변을 띠처럼 둘러싸고 도랑을 파기도 했으며, 촌락 밖에 묘지(墓地)와 도요(陶窯) 등을 두었다. 시안[西安] 린퉁[臨潼]의 쟝자이[姜寨] 유적(遺蹟)은 이러한 양사오문화 시대의 촌락 구조를 잘 보여준다. 양사오문화는 후기(後期)로 갈수록 단혼 가정의 독립 등 부계사회(父系社會)의 특징이 뚜렷해져서 모계사회(母系社會)에서 부계사회(父系社會)로의 변동을 보여주며, 빈부 격차나 사회 내부의 계층화가 진행되는 모습도 나타낸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는 백색(白色), 적색(赤色), 흑색(黑色)의 토기(土器)에 인면(人面), 동물(動物),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하여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중기(中期) 이후에는 물레의 사용도 나타나며, 룽산문화[龍山文化]의 흑도(黑陶)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의 채도(彩陶)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반포[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형과 허난성[河南省] 산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형의 채도가 대표적이다. 반포[半坡] 유형에서는 사람얼굴, 물고기그림, 사슴무늬 등의 동물 무늬가 주로 나타나며, 22종의 각획부호(刻劃符號)도 나타나 고대문자의 발달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먀오디거우[廟底溝] 유형에서는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의 채도가 주로 나타난다

 

중국 신석기 시대 다원커우 문화 [大汶口文化 (대문구문화),]

중국의 산둥성[山東省]장쑤성[江蘇省] 일대에서 나타난 후기 신석기 문화로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무렵까지 존재하였다. 1959년 황허[黃河]의 지류(支流)인 원허[汶河] 유역의 닝양[寧陽]의 보두촌(堡頭村)에서 유적(遺蹟)이 발견되었으며, 타이안[泰安]의 다원커우[大汶口]에서도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 뒤 산둥[山東]과 장쑤[江蘇] 지역에서 동일한 특징을 나타내는 100여 곳의 유적(遺蹟)이 발견되었고, 1964중국과학원(中國科) 고고연구소(考古究所)가 대표 유적의 이름을 따서 다원커우[大汶口] 문화라 이름 붙였다. 다원커우[大汶口] 문화의 영향은 산둥성(山東省) 중부의 타이산[泰山] 일대를 중심으로 동서(東西)로는 루시베이[西北] 평원(平原)의 동쪽에서 황해(黃海)까지, 남북(南北)으로는 장쑤[江蘇]의 화이허[淮河] 북부에서 보하이[渤海]의 남안(南岸)까지 폭넓게 분포하며, 안후이성[安徽省]허난성[河南省]에서도 비슷한 특징을 지닌 유물(遺物)이 발견되기도 한다. 다원커우[大汶口] 문화는 베이신[北辛] 문화의 특징을 잇고 있으며, 중국 동부(東部)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다원커우[大汶口] 문화는 전기(前期)와 중기(中期), 후기(後期)로 구분되어 발전하였다. 전기(前期)에는 홍도(紅陶)가 주로 나타나지만, 후기(後期)에는 흑도(黑陶)와 회도(灰陶)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고령토(高嶺土)를 사용한 백도(白陶)도 일부 발견된다.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3500년 무렵까지의 전기(前記)에서는 토기(土器)의 종류나 형태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소성온도(
)도 낮아 홍도(紅陶)가 주로 나타난다. 하지만 8별무늬를 새긴 두[, 굽이 높으며 뚜껑이 있는 제기(祭器)]가 발견되어 농경(農耕)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전 2800년 무렵의 중기(中期)부터 물레[轆轤]를 사용하여 좀더 다양한 형태의 토기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부터 회도(灰陶)나 흑도(
)가 늘어나고, 동물 모양 등을 본뜬 복잡한 토기들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8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무렵의 후기(後期)에 와서는 회도(灰陶)와 흑도(
)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데, 특히 이 시기의 흑도(黑陶)는 두께가 매우 얇으며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토기 제작 기술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이러한 흑도()의 조형 기술은 룽산문화[龍山文化]로 계승되었다.

경제 생활에서는 수렵(狩獵)과 어로(漁撈)도 나타나지만 농업이 중심이 되었으며, [] 등의 작물을 재배하였다. 돼지와 개, 소와 양 등이 사육되었으며, 농업 생산이 발달하여 후기(後期)에는 상당한 양의 잉여(剩餘) 양식(糧食)이 저장되기에 이르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간석기[磨製石器]를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돌도끼자귀날도끼, 끌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당시의 무덤에서는 뒷머리뼈[後頭骨]를 인공적으로 변형시키거나 윗앞니를 뺀 유골(遺骨)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독특한 풍속(風俗)의 영향으로 보인다. 대부분 널무덤[土壙墓]이지만 후기(後期)에는 덧널무덤[土壙木槨墓]도 발견된다. 고라니의 어금니를 죽은 사람의 손에 쥐어주는 풍습이 나타나며, 후기(後期)의 무덤들에서는 옥()이나 상아(象牙) 등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나 목걸이, 팔찌 등의 껴묻거리[副葬品]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돼지를 부유함의 상징으로 여겨 돼지의 머리뼈가 많게는 32개까지 함께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는 후기(後期)에 이르러 빈부(貧富)의 차이가 발생하고, 사유재산제도(私有財産制度)가 출현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부부(夫婦)를 합장(合葬)하거나, 부부와 아이를 합장한 무덤도 발견되는데, 이는 다원커우[大汶口] 문화의 후기(後期)에는 부계(父系) 씨족사회(氏族社會)로 전환되었음을 알려준다

[출처] 다원커우 문화 [大汶口文化 (대문구문화), Dawenkou Culture ]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심천(心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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