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 한국의 고화분과 화기(花器) 실물편 3-1-3 고려 시대의 중국화분-신안
1. 한국의 고화분과 화기(花器) 실물편
3-1-3 고려시대(1323년 전후) 중국 화분 - 신안 인양 유물
1. 중국 원나라 청자인각화문육각화분(靑磁印刻花文六角花盆) 높이 6.5cm 입지름 12.5cm
신안 인양 유물, 광주국립박물관 소장
1-2. 중국 청자인각화문육각화분 높이 6.7cm 입지름 12.9cm 밑지름 5.9c,m
-신안 인양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체적 형태가 동일하고 발굽의 조각(彫刻)이 같으면서 발굽이 약간 들리는 것까지도 같은 점으로는 동일한 화분인 듯하나, 제시된 크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화분 문양의 섬세성과 아름다움의 차이로 보면 같은 기형으로 만들어진 다른 화분일 수도 있다. 아래 화분에 비해 위의 화분은 문양이 단순한데 위의 화분 뒷면만 이렇게 섬세하고 복잡하게 문양을 넣었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운 점 때문이다.
이 배가 당시 고려와 거의 무역 거래가 없이 일본으로 향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물품이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것이었고, 고려는 이 배가 싣고 있는 물목이나 수준에 대해 별반 수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고려자기의 생산이 다량의 수출이 가능할 정도로 많은 생산이 있었던 것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배가 싣고 있는 물목이나 물목의 수준은 고려가 이미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이 형태의 화분은 이미 고려에서 만들거나 수입해서 쓰고 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고려의 소품 화분으로 사각 화분에 이어 육각화분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화분과 같은 문양이라면 매우 상품(上品)으로 아낌을 받았으리라 생각되고, 첫째와 같은 화분이라면 담백하고 날렵한 선적 아름다움이 있는 좋은 화분이라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그 미감과 선미는 많은 분재인들의 애호를 받을 만하다.
입지름이 12.9cm 라면 오늘날의 소품화분 크기이나 높이가 6cm 에 이르는 만큼 무게감 있는 수형이 어울릴 것이다. 고려 시대 선인들이 어떤 화훼 및 원에생활을 했는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나 둘 복원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2. 중국 원나라 청자화분 높이 18.4cm 입지름 23.8cm 밑지름 8.9cm 신안 인양 유물
이 당시 중국 화분에서는 이와 같이 곡선적인 모양이 돋보이면서 입지름이 넓고 밑자리는 좁아 안정감이 우려되는 형태의 화분을 자주 볼 수 있다. 중국에 이와 같은 화분이 있었다면 고려에도 당연히 있었을 것인데 어떤 수종이나 수형 혹은 진열 환경에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단순하고 담백한 선과 색채에 단지 구연부에만 물결무늬형으로 전에 모양을 넣었다.
3. 중국 원나라 백탁유 화분 높이 15.5cm 입지름 24.8cm 밑지름 10.8cm
-원나라 14세기 신안 인양 유물.
(고려의 화분에서 실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원나라 화분의 상당수가 밑자리가 좁은 것으로 미루어 고려의 중대형 화분에도 이와 같은 있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수종과 수형을 대상으로 어떤 진열 환경에 두고 감상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백탁유(白濁釉) ;
균요(均窯)계 요장(窯場)에서 주로 생산된 유약의 한 종류로, 가마 내 번조 분위기에 따라 도자기 유색이 불투명한 푸른빛과 흰색이 섞여 나타난다.
백색 불투명의 유약. 속칭 제유(鹈釉). 일반적으로 장석과 토회(土灰)로 만드는 토회유에 등겨의 재(籾殼灰)를 첨가하여 제조, 등겨 재에 함유되어 있는 규산이 실투(失透)작용을 한다. 제유라는 것은 ‘토끼의 얼룩’이라고도 하고 ‘바다새의 분(糞)’이라고도 하나, 다른 유약(예를 들면 흑유,황유)에 유를 첨가하면 이 이름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자연색을 내는 경우와 고의로 경색(景色, 燮化)을 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 충청남도 당진요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실투성(失透性) : 유리의 내부에 결정이 생겨 투명도가 낮아지는 현상. 유리는 본래 열역학적으로 불안정 상태에 있기 때문에 특수 약품에 닿거나 높은 온도에 장시간 놓이게 되면 결정화가 일어나 일부분이나 전부가 불투명하게 되거나 무르게 된다.
균요(鈞窯 ; Junyao)
均窯라고도 씀. 청색 또는 자색을 띤 실투성(失透性) 유약(釉藥)의 도자기. 중국
4. 중국 원나라 백탁유 화분-신안 인양 유물
역시 백탁유 화분이다. 국립해양박물관이 등록원부를 만들기 위해 첨부한 손톱만한 사진을 확대한 것이다. 다소 덜하긴 하지만 역시 안정감이 부족하다.
5. 균유화분 신안 인양 유물 172번
역시 손톱만한 사진을 확대한 것이다. 균유란 푸른 색유약을 말한다. 역시 하부의 밑자리가 다소 좁다.
6, 균유화분 신인 인양 유물 171번
역시 작은 사진을 확대한 것이다. 앞의 사진보다는 작은 것이다.
7. 균유 소화분 신안 인양 유물
(위의 두 화분보다는 작은 소화분이다. 전체적으로 쉽게 대량을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균유들은 일본 상류층의 용도를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일본 당대 서화를 조사해 보면 이런 류의 화분을 사용한 계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목간(木簡)에 적은 물목표를 보면 <동복사>로 가는 화물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기물들은 고급품이었을 것이다. 중국 도자기 연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당시 이미 쓰지 않는 도자들도 이 배에 일본수출용으로 선적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서민들의 도자용으로는 흑유도자가 주로 쓰였다고 한다. 이 또한 고려의 도자 및 분재, 원예생활을 위해 살펴야 할 부분이다.)
8. 이상의 신안 유물 인양 화분 화병 전시 광경
9.. 북송의 화분 옥션 사진
옥션 사진으로 보이는데 사진이 흐리지만 당시의 화분의 형태를 참고하기 위해 등재한다. 좌측의 첫 화분은 고려 청자화분의 유형 하나와 유사하며 그 아래 둘은 신안 유뮬선의 것과유사하다. 모두 우측의 분재용 평분과 비겨 크기에 차이가 없어 대형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측 상부는 제기 형태에 가까운 소품 사각화분으로 보이고 그 아래 둘은 오늘날의 분재용 평분에 가까운데 모두 족이 달려 있다. 중국의 문물은 곧 고려에 영향을 미쳤으니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수용이 되었을 것이다.
<10. 참조 : 신안선에서 인양된 고려청자 7점>
신안선에서는 7점의 고려청자가 발견되었다. 베개, 잔받침, 연적 등의 고급품으로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13~14세기경 제작된 것이다. 당시 고려청자는 일본 상류층의 선호하여 수입해갔는데 신안선 출토품과 유사한 고려청자가 일본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신안선 속 고려청자 경우 중국의
[신안해저발굴작업]
신안해저발굴은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 바다에서 1976년 10월부터1984년까지 11차 발굴이 진행되었다.발굴유물은 청자 · 백자 · 흑유(黑釉) · 백탁유(白濁釉) · 잡유(雜釉) · 금속제품 · 석제품(石製品) · 목제품(木製品) · 칠기(漆器), 토기(土器) 등이며, 그 수량은 2만 8000여 점에 달하였는데, 이 중 청자가 9,600여 점으로 가장 많다. 이 유물은 침몰된 거대한 목선(木船)에 실려 있었다. 목선의 가장 밑바닥 부분에는 동전(銅錢)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1984년까지 약 20t이 인양되었다. 그리고 향목(香木)으로 쓰거나 가구재(家具材)가 되는 자단목(紫檀木) 500여 점(약 8t)과 글씨를 쓴 목간(木簡) 300여 점 및 한약재(漢藥材)도 발굴, 인양되었다. 이들 유물은 상품(商品)이 대부분이나, 선원들이 항해하면서 사용하던 일부 생활용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인골(人骨)의 일부도 발굴되었다. 한편, 침몰선의 선체(船體)도 분해, 인양되었다. 청자 중에 고려청자 7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청자음각연당초문매병(靑瓷陰刻蓮唐草文梅甁) 1점, 청자상감운학문대접(靑瓷象嵌雲鶴文大楪) 1점, 청자상감연당초문잔대(靑瓷象嵌蓮唐草文盞臺) 1점 등이다. 이들 유물들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에 분산 관리되고 있으며, 특히 선박은 20여 년간의 보존처리 및 복원과정을 거쳐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유물 중 청자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룽취안요 계통으로 원대(元代)의 작품이 대부분이고, 송대(宋代)의 기법을 보이는 청자도 있다. 종류를 보면, 모란무늬·용무늬 등이 새겨진 화병이나 일반병이 많고, 줄무늬·용무늬·모란무늬 등이 새겨진 항아리, 무늬가 없는 소문(素文)·정병(淨甁)·대반(大盤)·주전자·대접·접시·사발·잔·향로 등이다. 특히 '사사수부 공용(使司帥府公用)'이라 새긴 화문(花文)접시가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이는 원나라 지방기관인 선위사사도원수부(宣慰使司都元帥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공용품(公用品)으로 보인다.
백자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징더전요[景德鎭窯]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유약에 약간 푸른 색이 도는 청백자 계통과 흰 순백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순백자 중에는 징더전요의 추부계(樞府系) 백자가 상당량 포함되어 있고 ‘복록(福祿)’ 등의 글씨가 양각된 것도 있다. 종류에는 항아리·병·대접·접시·향로·주전자·잔·연적(硯滴) 등이 있으며, 용무늬나 모란무늬·당초무늬가 새겨지기도 하고, 철반무늬[鐵斑文] 또는 철화(鐵畵)로 천록(天鹿)이나 연꽃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원대(元代)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흑유(黑釉)는 천목(天目)과 일반 흑유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천목은 허난[河南] 천목 계통과 유사한 것이 있고 일반 흑유는 칠흑색(漆黑色)·흑갈색·다갈색 등이다. 흑유의 종류는 항아리·단지·잔·사발 등이다. 백탁유 계통의 화분(花盆)이 많고 백유흑화(白釉黑畵)의 항아리와 병이 있으며, 옹기 같은 단지들이 많다.
그밖에 금속제품으로는 은으로 만든 정병(淨甁)·매병(梅甁)·접시 등이 있고, 청동으로 만든 촛대·향로·거울·바라(악기)·자물쇠·주전자·세발두꺼비·수저·냄비·적자(炙子)·사발 ·인물상 등 종류가 다양하다. 돌로 만든 벼루·맷돌·동물조각 및 숫돌 외에 유리제품도 있고, 나무로 만든 용기들과 도자기를 포장했던 상자 및 불상 등도 나왔다. 철기는 잔이나 발(鉢)·벼루·쟁반 등이 있고, 백동정(白銅鋌)도 많이 인양되었다. 한약재로서 초과(草果)·호초(胡椒)·산수유·아출(莪朮)·파두(巴豆) 등이 있었다. 특히 동전은 오수전(五銖錢)을 비롯한 70여 종(嘉祐元寶·嘉定通寶·開元通寶·乾元重寶·景德元寶·景祐元寶·景定元寶·萬國通寶 ·大觀通寶 ·大定通寶 ·明道元寶 ·祥符元寶 ·宣和通寶 ·聖宋元寶 ·紹聖元寶 ·紹熙元寶 ·宋元通寶 ·淳化元寶 ·淳熙元寶 ·元符通寶 ·元祐通寶 ·元豊通寶 ·正隆元寶 ·政和通寶 ·至道元寶 ·至和元寶 ·天聖元寶 ·天禧通寶 ·治平元寶 ·咸平通寶 ·皇宋通寶 ·熙寧通寶 ·紹定通寶 ·至大通寶)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의 돈은 1310년에 제작된 지대통보(至大通寶)이다.
침몰선에서 발견한 목간(木簡) 물표(物標)로 확인한 결과 이 배는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에 중국(원나라) 경원(慶元: 현재의 寧波)에서 무역품을 가득 싣고 출발하여 일본 하카다(博多), 교토(京都) 쪽으로 향하던 국제무역선이었다. 그 물표의 하주(荷主)는 일본 동복사(도후쿠지사)로 되어 있었다.
이 배가 도중에 고려에 들러 고려 청자와 보급품을 실었는지, 아니면 이미 중국에 들어가 있던 고려 청자를 처음부터 중국 땅에서 싣고 곧바로 일본으로 가던 길이었는지는 알아낼 길이 없었다.
배는 길이 32m,너비 10.9m,높이 4m(흘수선까지는 2.95m), 선체는 열 개의 격벽 구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게 187톤에 무려 150톤의 짐을 실을 수 쌍돛을 단 아주 큰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