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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22.07.22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어 멘델 출생

必 霧 2015. 7. 14. 08:58

 

1822.07.22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어 멘델(Gregor Johann Mendel) 출생

 

 

 

 

 

 

1884.01.06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3022

 

 

멘델의 만들어진 신화
멘델은 유전의 법칙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잡종화에 의한 신종의 출현을 연구한 것
김우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원·초파리유전학-한겨레21, 2010.04.09.
http://h21.hani.co.kr/arti/culture/science/27090.html

 

 

 

 

 

 

“나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 유전법칙을 발표한 그레고어 멘델(1822~1884)이 만년에 한 말이다. 그의 학설이 이해되는 데는 그의 사후 새로운 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멘델은 1822년 오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 매렌지방(지금의 체코)의 작은 읍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농사와 원예일을 도우며 자연과 친했다. 학문에 대한 애착이 컸으나 아버지가 지주의 강제노동으로 병을 얻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수도회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해 수사이자 로마 가톨릭 신부가 됐다.

 

나중에 대학진학을 시도했으나 실패, 수도원장과 주교의 추천을 받아 대학청강생으로 자연과학의 기초를 익혔다. 그가 수도원의 작은 뜰에서 유전실험에 사용한 완두콩은 품종이 다양하고 수분(受粉)이 쉽다는 점에서 선택됐다. 또 그의 실험은 계획의 교묘함, 실험의 정확성, 자료처리법의 탁월성, 논리의 명쾌성을 정평이 났었다. 멘델이 살던 시대에도 유전현상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연히 유전물질은 액체와 같이 서로 섞여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를 멘델이 구체적으로 입자에 가까운 물질이 있어 유전되는 것으로 인식을 바꿔놓았다. 평생 멘델은 225회에 걸쳐 여러 식물을 인공교배시켜 1만2천종의 잡종을 얻어냈다.

 

우문기기자 /매일신문

 

 

 

1822년 7월 22일 근대유전학의 창시자이자 성직자인 그레고어 멘델이 오스트리아의 하인첸도르프에서 태어났다.

1851년~53년 빈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식물학을 공부한 멘델은 브륀에서 수도사로 있으면서 수도원 정원에서 약 7년에 걸쳐서 완두콩을 이용한 교배 실험을 하였고 그 결과 유전에 관한 법칙을 발견했다.

1865년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학회에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나 거의 무시되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업적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멘델의 법칙’으로 불리는 이 법칙은 우수한(우성) 유전자와 뒤지는(열성) 유전자를 교배해 얻은 잡종 1세대는 우성형질만 나타나고 열성형질은 숨어버린다는 것 등이다.

멘델이 발견한 유전법칙은 훗날 ‘분리의 법칙’, ‘우열의 법칙’, ‘독립의 법칙’ 등으로 정리되어 연구 방법과 함께 근대유전학의 출발점이 됐다.

 

/부산뉴스

 

 

 

 

멘델 [ Gregor (Johann) Mendel ]

1822. 7. 22 오스트리아 하인첸도르프~1884. 1. 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륀.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식물실험자.

 

처음으로 유전학의 수학적 토대를 확립했으며, 이러한 작업들은 멘델 법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학력과 초기경력

그는 일찍부터 자연과학에 관심이 있었다. 올뮈츠(지금의 체크의 올로모우츠)의 철학연구소에서 2년간 공부한 후, 1843년 모라비아의 브륀(지금의 체크 브르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세례명은 그레고어이다. 1847년에는 수도사로 임명되었으며 수도원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에 과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1849년 에 멘델은 브륀 근처에 있는 즈나임(즈노이모) 중등학교의 보조교사가 되어 잠깐 동안 그리스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1850년에는 정규교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는데, 가장 잘못 치른 과목이 생물학과 지질학이었다. 그뒤 대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빈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물리학·화학·수학·동물학·식물학을 공부했다(1851~53). 1854년 브륀으로 다시 돌아와 1868년까지 그곳에 있는 기술고등학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으나 교원자격증은 끝내 얻지 못했다. 그해에 그는 그가 있던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856년부터 수도원의 작은 정원에서 실험을 시작하여 유전의 기본원리를 발견했으며 이러한 원리들은 나중에 유전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연구를 했으나, 과학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일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가운데 몇몇은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1862년 브륀에서 자연과학학회를 창립했으며 멘델은 이 모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수도원과 학교의 도서관에는 중요한 과학서적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과수원과 농장에서 얻었던 경험들 때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농학·원예학·식물학에 관한 책을 많이 보았다. 멘델 자신도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책들이 나오면 곧 구입을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1860, 1870년대에 출판된 찰스 다윈의 연구 노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멘델은 다윈의 맨 처음 저서가 나오기 전에, 또한 유전이 진화의 원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이미 실험을 시작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1865년 2월 8일과 3월 8일에 열린 브륀 자연과학학회에서 결과를 보고할 때에도 '식물의 교잡'에 대한 깊은 관심을 언급했으며, 이 분야에서 자기보다 먼저 발표한 사람들의 연구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히면서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행해진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잡종의 자손들에서 나타날 수많은 형들을 결정하거나, 또는 이러한 형태들을 각 세대에 따라서 확실하게 구분하거나, 이들 사이의 통계적 상관도를 명확히 밝힐 수 있을 만큼 폭넓고 올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하나도 없다."

 

유전 연구 실험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에 대한 이러한 논술과 그 조건들을 만족시켜주는 예비 실험 자료들을 통해 그는 유전과 진화 및 일반적인 생물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유전법칙의 발견

그는 자신이 관찰하면서 정원에서 길렀던 여러 가지 완두를 서로 교배했다. 이들 완두는 키가 큰 것과 작은 것, 잎겨드랑이에서 꽃이 피었을 때 색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등과 같이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대립형질과, 씨의 색·모양, 줄기에 꽃이 피는 위치, 콩꼬투리의 모양 등 유사한 차이를 갖는 대립형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식물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대립형질이 변종과 그들의 자손에 계속 나타나는 것은 유전의 기본단위 때문이라는 이론을 세웠는데, 이 유전단위가 지금은 유전자(遺傳子)로 알려져 있다. 실험결과에 대한 멘델의 해석은 사람을 포함한 다른 생물들을 통해 계속 관찰되면서 충분히 증명되었는데, 이는 유전단위가 간단한 통계법칙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칙의 기본원리는 잡종의 생식세포 안에는 양친 중 어느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 절반과 다른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이 절반씩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식세포 안에서 대립형질이 분리되는 것을 멘델의 제1법칙 또는 분리의 법칙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립형질들이 여러 쌍 있을 경우, 이러한 형질들은 모든 가능한 조합을 이루며 독립적으로 자손들에게 전해진다고 했다. 그가 뿌린 완두의 여러 변종들에서, 그는 독립유전의 법칙에 따라 무작위로 재조합된 7쌍의 대립형질들을 관찰했으며, 이러한 원리를 통계적으로 검증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현재 멘델의 제2법칙, 즉 독립의 법칙은 서로 다른 연관 그룹 또는 서로 다른 염색체상에 있는 유전자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멘델은 우성도 관찰했는데, 이것은 잡종이 대립형질 가운데 1가지 형질만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형질을 우성형질이라고 했으며, 관찰한 7쌍의 형질에 모두 나타난다고 보았으나 더욱 광범위한 실험을 통해서 이것이 모든 대립형질에 적용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들이 그가 처음 증명한 특별한 유전단위 또는 유전자에 의한 유전 체계가 기본적으로 틀렸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초 멘델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체계는 검증·확인되어 일반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생물학의 기본적인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험결과로부터 유추한 이러한 이론과 설명은 2편의 논문에 실려 있는데, 1865년초 자연과학학회에서 발표했으며 다음해 이를 좀더 자세하게 기록해 학회 회보에 게재했다.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 Versuche über Pflanzenhybriden〉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논문은 유럽과 미국의 주요한 도서관에 보내졌지만 당시에는 브륀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생물학적인 견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뮌헨대학교의 유명한 식물학자 칼 빌헬름 폰 네겔리는 멘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학자지만 멘델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네겔리조차도 멘델의 논문에 실린 수학적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멘델은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 다른 식물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려고 노력했다. 1869년 또다른 1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그가 조사한 식물은 네겔리가 멘델에게 실험재료로 추천한 조밥나물속(―屬 Hieracium)으로, 이 식물의 배(胚)는 수정이 일어나지 않고 밑씨가 자라 만들어지는 체세포 단위생식(單爲生殖)을 하기 때문에 검증재료로는 본질적으로 적당하지 못했으며 멘델의 원리를 확인하기에도 부적합했다. 식물학·벌키우기·기상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868년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 되면서 과학은 그의 생활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그는 수도원을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수도원에 대한 세금 때문에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동료 수도사들과 자기가 살던 도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나, 당시의 위대한 생물학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00년 유럽의 식물학자 칼 에리히 코렌스, 에리히 체르마크 폰 세이세네크, 휴고 드 브리스 등이 각각 멘델과 비슷한 결과를 얻어내고 34년 전에 발표된 실험결과와 개괄적인 원리를 문헌에서 찾아냄으로써 그는 죽은 뒤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은 멘델의 실험이 유전학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많은 나라의 생물학자들이 멘델의 학설을 확인하고 그 응용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진화학·발생학·생리학·생화학·의학·농학·사회과학 등을 이해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L. C. Dunn 글 | 申鉉哲 옮김

 

 

멘델 법칙 [ Mendelism ]

1865년 오스트리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 그레고르 멘델이 제시한 유전법칙.

 

이 법칙은 어떤 단위 또는 유전자에 의한 입자성 유전체계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유전단위의 매개체인 염색체의 발견으로 멘델의 2개의 기본법칙인 독립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멘델의 제1법칙인 분리의 법칙이란 유전자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각기 분리되어 전달된다는 것이다. 유전자쌍의 두 대립유전자(쌍을 이룬 염색체에서 서로 대응하는 부위)들은 성세포 형성과정에서 어버이에 의해 분리된다.

 

성세포 중 절반은 어떤 한 형태의 유전자를, 나머지 반은 또다른 유전자 형태를 갖게 되고 이러한 성세포로부터 발생하는 자손에는 이러한 유전자 비율이 반영된다. 독립의 법칙은 멘델의 제2법칙으로서, 1쌍의 염색체에 위치하는 유전자쌍의 대립유전자가 다른 염색체에 있는 대립유전자쌍에 대해 독립적으로 유전하고,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성세포들은 다른쪽의 어버이가 만든 성세포들과 무작위로 융합한다는 것이다.→ 멘델

 

 

/네이트 백과사전

 

 

 

 

유전법칙

톱스타 선남선녀의 열애 소식과 함께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 둘의 이목구비를 섞은 2세 합성사진이 떠돌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빠의 외모가 출중하니 그 둘의 아이도 잘 생겼으리라는 사람들의 추측과 기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식이 부모로부터 다양한 형질을 유전 받는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또한 유전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예부터 인위선택을 통해 품질개량을 해 왔다. 이미 기원전 4,000년에 고대 바빌로니아의 유적에서 말의 혈통과 육종에 관한 기록이 발견됐다. 유전의 원리는 언제 처음으로 밝혀졌을까? 밝혀낸 사람은 누구일까?

 

멘델의 유전법칙. <출처: gettyimages>

 

 

유전학의 아버지, 멘델

유전의 원리를 알아내는 과학적 사고는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에 의해 처음으로 실행됐다. 멘델은 오스트리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공부를 하기 위해 수도원의 수도사가 됐다. 그는 빈 대학에서 식물학과 수학을 2년간 수학했는데, 당시 지식으로 수도원 뒤뜰에서 7년간 완두를 가지고 그것들의 형질이 어떻게 유전되는 가를 실험했다. 멘델이 선택한 완두에 대해서는 당시 많은 정보가 있어 완두를 키우고 교배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멘델은 선택한 완두가 양자택일 방식처럼 노란색이 아니면 초록색이라는 식으로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한쪽의 형질만 나타나고, 이러한 형질이 후손에게 일정한 패턴으로 전달되는 것을 알았다. 멘델은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단순화를 이끌어내는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멘델이 실험에 사용했던 완두는 순수계통(순계)으로서, 하나의 꽃 속에 생식기관인 수술과 암술을 모두 갖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자가수분을 거듭했기 때문에 형질은 변화 없이 자자손손 전달됐다. 그는 순계의 형질 중 꽃의 색, 종자의 색, 종자의 모양, 꼬투리의 색, 꼬투리의 모양, 식물체의 키 그리고 꽃의 위치에 대한 일곱 가지 유전형질에 대해 실험 분석했다.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리 멘델.

 

1865년 2월 8일 멘델이 그 연구결과를 학회에 발표했지만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형질을 결정하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했던 멘델의 발표는 토론 없이 끝났고, 반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3)의 새로운 개념인 자연선택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토론됐다. 그러나 멘델은 유전의 법칙을 통계학적으로 증명한 최초의 수리생물학자였다.

 

 

완두콩 실험으로 밝힌 유전의 원리, 멘델의 법칙

완두콩. <출처: gettyimages>


멘델은 먼저 한 가지 형질을 가지고 단성교배를 통해 유전패턴이 아주 정확하고 간결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노란 완두콩이 열리는 형질의 꽃가루를 초록색 완두콩이 열리는 완두의 암술머리에 붓으로 묻혀 타가수분 시켰다. 그 결과 다음 세대의 콩은 두 가지 색이 섞이지 않고 오로지 노란색만을 띠었다. 이처럼 제1대 잡종에서 나타난 노란색 콩의 형질을 우성(dominant)이라고 하고 나타나지 않은 초록색 콩의 형질을 열성(recessive)이라고 했다. 두 형질 중 우성형질만이 나타나므로 이를 ‘우성의 법칙(우열의 법칙)’이라고 했다.

 

이때 사라진 열성형질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멘델은 제1대 잡종의 콩을 자가수분 시켰다. 이때 사라졌던 열성형질이 다시 나타났으며, 제2대 잡종에서는 노란색 콩과 초록색 콩이 3:1의 비율로 생겼다. 이를 분리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멘델은 한 식물 개체에서 어떤 형질을 결정하는 인자는 2개이며, 각각은 어버이에게서 오고 그 둘은 서로 대립되는 변이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 변이체가 노란색 콩의 형질과 초록색 콩의 형질이다. 멘델이 인자라고 불렀던 것은 1909년 덴마크의 빌헬름 요한센(Wilhelm Johannsen, 1858~1927)에 의해 유전자(gene)로 대체되었고 변이체는 대립유전자로 불려지게 됐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두 가지 형질이 서로 다른 형질에 대한 양성잡종 교배를 통해 한 형질에 영향을 주는 한 쌍의 대립유전자가 다른 형질에 영향을 주는 한 쌍의 대립유전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실험했다. 멘델은 이 실험을 위해 둥글고 노란색 종자와 주름지고 초록색의 종자를 교배했다. 제1대 잡종에서는 둥글고 노란색의 종자가 열렸다. 멘델은 그 다음 제1대 잡종을 자가수분 했을 때, 양성잡종의 제2대 잡종 자손에서 9:3:3:1의 표현형의 비율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독립분리의 법칙’이라 칭했다. 즉, 두 쌍의 대립유전자는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멘델은 형질을 나타내는 인자는 세대를 거치더라도 유지되는 일종의 입자와 같다고 생각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우성의 법칙(우열의 법칙), 분리의 법칙, 독립분리의 법칙으로 이루어진다.

 

 

멘델은 이 간단한 결과를 가지고 유전법칙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당시 크게 대두된 혼합유전 때문에 멘델의 이론을 다윈을 비롯한 자연주의자들은 그릇된 것이라고 믿었다. 멘델은 유전형질이 입자와 같아서 섞이지 않는다고 믿었고 브륀에서 개최된 자연과학사협회 정기총회에서 ‘식물잡종에 대한 실험’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 다음해 동학회의 잡지에 게재됐으나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으며, 멘델은 끝내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멘델의 연구 후대에 빛을 발하다. 현대 유전학의 등장

이후 35년이 지난 1900년에 네덜란드의 휘호 더프리스(Hugo de Vries, 1848~1935), 독일의 카를 코렌스(Karl Correns, 1864~1933)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에리히 폰 체르마크(Erich von Tschermak, 1871~1962)가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거의 동시에 멘델이 발견한 것과 동일한 규칙을 재발견했다. 이 식물학자들이 자신들의 논문에서 34년 전에 발표돼 잊혀져 있던 멘델의 논문을 인용해 그의 업적을 세계에 알려지게 했다는 것에 경의를 보내야 한다. 이들 세 사람의 윤리적인 용기는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멘델이 발견한 유전법칙에 멘델의 법칙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은 코렌스였다. 멘델은 생물학에 대해서 일대 사고의 전환과 그의 연구방법으로 유전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위대한 발견을 이룩했다.

 

멘델의 뒤를 이어 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염색체상에 존재하며 염색체는 세포의 핵 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전자 정보들이 핵산인 DNA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1950년대가 되자 DNA상의 유전암호를 해석할 수 있게 됐다.


인간(남자)의 염색체 핵형.

 

오늘날에는 이 유전암호를 이용해서 인간의 유전병의 기원을 알아내고 있으며 이미 인간의 게놈(genome)분석을 완성하는 단계까지 왔다. 이제 DNA의 분석을 통해 유전자를 조작해서 우리가 원하면 인간의 운명을 조작할 수도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 

 

현대 유전학의 무대를 마련한 멘델의 법칙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지 벌써 한 세기가 지났다. 21세기는 생명과학의 시대로 모든 국가가 생명과학에 높은 관심을 갖고, 특히 인간의 질병과 본성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비록 멘델의 생애에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재에는 그의 업적이 씨앗이 되어 다수의 과학자들이 생명현상에 대한 유전적 표적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1.   형질(形質)

      어떤 생명체가 갖고 있는 모양이나 특성.

  2.   육종(育種)

      생물이 가진 유전적 성질을 이용하여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 품종을 개량하는 일.

  3.   자가수분(自家受粉)

      그루의 식물 안에서 자신의 꽃가루를 자신의 암술머리에 붙이는 현상.

  4.   단성교배(單性交配)

      한 쌍의 대립형질만을 대상으로 교배.

  5.   타가수분(他家受粉)

      같은 종의 식물에서 한 식물 개체의 꽃가루가 다른 식물 개체의 암술머리에 붙는 현상.

  6.   변이체(變異體)

      하나의 안정적인 표현형적 변화를 나타내는 배양물이나 개체.

  7.   대립유전자(對立遺傳子)

      쌍이 될 수 있는 대립형질의 유전자.

  8.   염색체(染色體)

      유전물질을 담고 있으며 세포분열 시 핵 속에 나타나는 굵은 실타래나 막대모양의 구조물.

  9. 게놈(genome)

      한 생물이 가지는 모든 유전 정보.

 

 

 

홍영남 / 서울대 명예교수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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