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나무탁자와 사프란블루 그리고 모독
어제 하루종일 박달나무탁자를 만들었습니다.
3년 전 귀농하자마자 뒷산을 돌아보다가 본 나무였는데 그 사이 까닭모르게 죽어 선채로 말라있던 나무입니다.
그대로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워 이틀 전쯤에 엔진톱으로 잘라 끌고 내려왔습니다.
껍질을 벗기고 깔끔하게 긁어내고 단면을 적당히 갈아내니 그냥 그대로 탁자가 되었습니다.
무게가 엄청나 방으로 들이는데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위쪽 단면
나무입장에서는 아래쪽인가요?
다리쪽 단면
다리 사이를 긁어내다 보니 어머니의 자궁같은 공간이 있습니다.
이렇게 놓으면 나란히 또는 마주앉는 의자도 되겠네요. ㅎㅎ
소파앞에 놓고 글도 쓰고
다리도 올려 놓고
새로 만든 박달나무 탁자 위에서
한효정 시인의 두번째 시집 <사프란블루>를 펼쳐 봅니다.
그 중 <모독>이라는 詩를 소개해 봅니다.
오독이었을 제목을 모독으로 오독한 詩라고 해야 되나요.
오독의 내면에는 의뭉한 마음이 들어 있어서
나는 신기루 같은 당신을 시름시름 앓다가
어쩌면 우리의 삶은 오독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과 내 마음 속에 존재하는 풍경이 그렇게 만드는거지요.
십대 후반쯤에 저의 그림공부 첫 스승께서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자기만의 풍경을 가지고 태어나지.
바로 그것을 그리는 것이 그림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는 그 뜻을 모르다가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지요.
그것이 오독이든 시인의 생각처럼 모독이든 팔분 전의 태양이든 상관없지않을까요.
산 속에 서서 죽어 있는 박달나무를 오독했든 모독했든 나의 탁자로 또는 의자로 잘 쓰고 있다는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관찰수업을 할 때 아무리 냉철하게 관찰하려 해도
각자의 냄새를 지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소름끼친 적이 있지요.
살면서 나를 찾다가 찾다가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던져 버릴지라도
내 방식대로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오히려 행복할 것 같아요.
詩 한 편 더 소개해 봅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조금 더 크게 보입니다.
내 안에서 푸른 눈의 아이가 꿈틀거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