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화분

[스크랩] 1. 한국의 고화분과 화기(花器) 실물편 3-1-2 고려청자 소화분과 화분대

必 霧 2011. 12. 10. 08:58

1. 한국의 고화분과 화기(花器) 실물편

 

3-1-2 고려청자 소화분과 화분대

※ 이하에서 ( )속의 진술은 본인의 견해입니다.

 

1. 고려청자흑백상감국화문화분(高麗靑磁黑白象嵌菊花紋花盆) 직지성보박물관 소장

높이 12cm 입지름 12.5cm 밑지름 9cm 고려 13세기

 

 

   (13세기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형태와 문양이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다.

   외견상 대형 화분으로 보이는데 규격으로 보면 오늘날 소품용 화분에 해당한다. 형태상으로는 오늘날 대형 화분의 축소형이라 할 만한데, 이러한 소품분에 무엇을 심어 완상했는지문헌 기록과 조선조 기명절지도에 이르기까지의 서화를 살피면 그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입지름이 12.5cm라면 오늘날처럼 분식과 분재를 구별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충분히 분재를 심거나 석부나 수석용으로 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게다가 형태나 문양상 하려함이나 세련됨이 강조된 화분이 아니어서 석부용이나 괴석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많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제까지의 대형화분과는 다르게 발(足)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화분의 발 유무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또 어떤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 발굴된 중대형 화분에는 통풍용으로 만든 굽이나 발이 없고 소품 화분이나 오늘날의 분재용 형태의 화분에는 발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 관찰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중대형 화분보다는 소품용 화분이 실내에서 더 오래 관상하게 된다는 가능성과 중대형 화분과 달리 소품용 화분은 화분대가 간편하거나 화분대 없이 그것만으로 관상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청자상감포류수금문화분(靑磁象嵌蒲柳水禽文花盆)

 

 

   (시기가 알려지지 않은 옛 옥션 도록에 실린 화분이다. 고려청자 화분 형태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서 상태가 좋지 않은 사진이지만 함께 살핀다. 소장자의 공개를 바란다.

   제기로 쓰는 향로의 형태와 유사하다. 오늘날의 분재분보다 중후한 느낌을 표현하는 데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태가 되면 화분 자체의 아름다움도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규격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데 앞에서 살핀 백자 수반의 형태와 유사하여 그와 비슷한 소품용 화분 크기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사각수반의 경우 높이 10cm 내외, 구경 15cm 내외였는데, 백자 수반보다 가로가 길어서 형태상 안정감이 있고 진중하면서도, 발이 단단하고 상대적으로 길어서 날렵한 맛도 있다.

   사각화분과 사각 수반의 화분 높이가 다 높은 심미적 이유와 관상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는 분재보다도 괴석에 대한 선호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 당시의 수석은 가로보다 세로가 긴 형태여서 화분의 안정감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양은 황돌대와 종돌대로 화면을 액자화하는 중대형 원분(圓盆)의 문양 방식을 쓰고 있다. <포류수금문>은 고려청자의 대표적 문양의 하나이다. 갯버들과 물새들이 주된 문양이니 수목이나 화목을 심어 감상하는 화분으로 썩 잘 어울릴 것이다. 이 문양과 이 형태의 화분에 어울리는 수종과 수형 또한 고려와 조선의 분재와 원예생활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이루어지고 심화되면 추정 가능할 것이다.)

 

※참고로 고려시대 향로를 함께 보기로 한다.

청자양인각도철문사각향로(靑磁陽印刻饕餮文方形香爐) 고려 12세기 보물 1026호

높이 11.8 cm   상부크기 17.5×14.9cm   하부크기 12.5×9.4cm

 

 

 

   고려청자로는 매우 드물게 보이는 형태로, 고대부터 의례(儀禮)에 사용되던 동기(銅器)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장방형(長方形)의 몸체 윗면 두 곳에 직사각형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그 안쪽에 계단형의 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뚜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깥 면에는 주둥이 쪽에 번개를 상징하는 뇌문(雷文)이 있고, 몸체 전면에 동심원과 회오리 모양의 무늬를 반복적으로 장식하면서 아래쪽에 두 눈을 부릅뜬 것 같은 형상의 도철(饕餮)을 양각하였다. 도철은 전설 속에 나오는 ‘탐욕’을 상징하는 짐승으로, 주로 제기(祭器)의 표면에 장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욕심’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전면에 담녹색(淡綠色)의 유약을 얇게 씌웠으며, 굽바닥 여섯 곳에 규석을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복잡하고 섬세한 문양을 틀로 찍어 장식한 시문수법이 놀랍도록 정교하며, 이 문양을 살리게끔 베풀어진 아름답고 은은한 청자유약과의 완벽한 어울림은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빼어난 솜씨이다. 사진에서 보듯 청자는 조명의 상태에 따라 색상에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고풍스런 고동기(古銅器)는 구하기 어려우므로 그와 같은 형태로 화분을 제작해 소유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화려하거나 세련된 미의식의 한편에 이와 같이 진중하고 고풍스런 미의식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고풍스런 고동기(古銅器)에 대한 선호는 조선조 말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기명절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3. 청자상감모란운봉문화분부승대(靑磁象嵌牡丹雲鳳文花盆付承臺)

높이 23.3cm 고려시대 14세기 전반 이화여대박물관

 

 

  그릇바닥과 대상면(臺上面)에 구멍이 뚫린 화분으로 분(盆)에는 운학(雲鶴), 모란(牡丹), 봉(鳳)을 가득히 상감하고 대(臺)는 8각 난간과 연판(蓮瓣)을 투각(透刻) 장식했다. 화분과 받침을 갖춘 완형의 상감청자로는 이것이 유일하며 청자로 다양한 일상용기로 만들었던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것과 유사하다.

 

  ( 중국분재사에서 이런 화분이 있었다면 반드시 자료 사진으로 제시했을 터인데 이런 화분과 화분대를 찾아 볼 수 없다. 고려인들의 심미안과 창조적 조형감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많은 분재인들이 이 분기(盆器)를 보는 순간 이런 화분과 화분대 1점에 분재를 키워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할 경우 일본분재전시에 바탕한 이제까지의 감상, 전시 의도나 방식과는 달리, 화분 자체도 감상의 대상이 되는 분재 및 원예생활의 전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크기를 보면 사진으로 보는 모습이 너무 미려하여, 예쁘고 아담한 콩분재 크기일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전체 높이가 23.3cm라고 한다면 비례로 보아 입지름 약 15cm 화분 높이 13~14cm 정도로 화분의 구실을 하기에 충분한, 작지 않은 크기의 화분이다. 게다가 같은 직경의 오늘날의 화분보다 높이는 3배 정도 높다. 같은 면적의 오늘날의 화분보다 2배 이상 큰 나무를 안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화분의 문양은 가득한 모란, 구름, 학, 연판, 봉새 무늬로 넉넉함을 연출하면서도 아래쪽에 있는 연판문과 모란문에 색을 넣어 아래가 무겁고 위가 가벼운 인상을 가지도록 안정감을 주고 있다. 화분대는 불교의 부도의 일부와 탑파의 일부를 조합한 듯한 형태로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화분대의 형태로 볼 때 불전(佛殿) 공양용이 아닌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화분의 형태는 앞에서 살핀 중대형 화분과 같이 통풍용 굽도 발도 없는 형태로 추정되는데, 이 화분과 화분대의 형태는 이렇게 생긴 화분의 배수와 통풍은. 앞의 중대형 화분편에서 추정한 바대로 화분대의 사용으로 해결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화분과 화분대에 배수용 구멍이 뚫려 있고 난간의 구멍은 장식적 효용이 더 크나 그 밑의 연결부의 구멍은 화분 밑의 구멍이 통기성을 갖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화분과 화분대 일습형에서 화분대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 의외이다. 오늘날의 원예생활에서 화분대란 거의 배수용 물받이 대신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화분대에까지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이 화분들은 실외 감상을 기본으로 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서화를 보면 화분만이 아니라 화병까지도 실외감상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아름다운 화분은 당연히 실내에서도 감상했을 것이고, 고려시대 무신귀족과 의종임금이 자주 연회를 열어 자신의 권력과 영화를 과시했다는 기록을 보면 화목이나 수목을 심은 화병 화분의 실내전시도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화분은 식물의 생존에 불가결한 영양분 제공의 터전이라는 생리적 기능 외에, 감상의 대상이 되는 나무를 특화시켜 그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심미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화분대는 그 화분과 분재수에 감상에 필요한 높이와 미적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심미적 기능을 갖는다.

 

   놀라운 것은 이 화분대의 경도(硬度)이다. 그 당시는 실용을 목적으로 한 화분이었으니 약 2리터 이상의 흙을 담고 여기에 나무의 무게를 더한 무게를 견뎌야 하는데, 1300도 이상에서 구운 경질자기라고 하지만 경험하지 못한 오늘의 분재인으로서는 안전 하중의 측면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훗날 분재역사관에는 반드시 전시되어야 할 분재역사물이다.)

 

 

 

 

4. 청자상감화분대(靑磁象嵌花盆臺) 입지름 21cm 높이 12.3cm 고려 중기 부산시립박물관

 

 

   입부분과 몸통부분은 새로이 수리되었다. 태토와 용융상태는 양호하며 빙렬이 약간 있다. 유색은 연한 황색이 약간 있는 녹색을 띠고 있다. 직립된 입부분에서 삼단의 윤곽을 따라 뇌문대(雷文帶), 연판문(蓮瓣文), 당초문(唐草文), 국화문(菊花文)을 빽빽하게 흑백상감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원형으로 구멍을 뚫었다. 받침대의 바닥은 유약을 일부 긁어낸 후 세 곳에 규석을 받쳤다. 녹색의 유색과 규석받침 등은 고려중기 상감청자의 특징이다.

 

   (고려 시대의 다른 청자 기물(器物)에 못지 않은, 대단한 아름다움을 가진 화분대이다. 어느 정도의 화분이 여기에 올라야 어울릴 것인가 궁금하다. 중국분재사에서 <돈>에 해당하는 혹은 그보다 큰 대형 화분대는 꽤 많이 보이지만, 역시 이와 같은 분기(盆器)는 중국분재사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분재 전통이나 분재미의식의 상실이 안타깝다.

   높이가 12.3cm인 것은 화분과 분재수를 돋보이기 위한 것이다. 입지름이 21cm라는 것은 오늘날 규격으로 최소한 중품분재에 해당한다는 것인데, 그 화분과 소재 식물은 매우 미려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5. 청자흑백상감화분받침대 15.8x10cm 12세기 서울옥션 30회 경매(2000년 10월 5일)

 

   옥션 경매품으로 공개되었던 것이다.

   이 화분대 또한 고려조의 화분대가, 화분이나 분재수에, 감상에 적절한 높이를 제공하는 것과 아울러, 자신이 특화(特化)시키는 분재수와 화분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짐으로써, 진열과 전시에 있어 일습으로 완결된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목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면을 바로잡은 상태에서 문양과 투각에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으나 색감이나 섬세한 아름다움은 부산대 박물관의 것이 돋보인다.

  배수 구멍을 뚫은 정도가 아니라 상부에 화분을 받칠 부분이 전체적으로 뚫려 있어 이 화분대는 그 짝이 되는 화분이 함께 제작되었거나, 이런 용기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는 화분들이 두루 생산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앞의 경우도 화분의 밑지름이 화분대의 상부지름에 맞아야 할 것이므로 화분은 함께 일습으로 제작된 것이거나 당시 소품용 화분의 관행적  크기였을 것이다.

 

이하에서 이러한 화분대에 의한 감상이 일반적이었을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다른 화분대들을 제시한다.

 

 

 

 

6.청자음각당초문화분대 7.청자양각모란문화분대

 

 

 

각각 앞의 것과 형태상의 유사성을 지니는데 그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4. 청자상감화분대(靑磁象嵌花盆臺)>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 화분대들은 소품용 분재나 분화의 감상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화분대를 갖춘 관상방식이 일반적 관행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8. 청자방형대(靑磁方形臺) 높이 8.6cm 밑지름 16.7㎝ × 17.8㎝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측 기록은 전체 너비 29.6cm라 하나 높이와의 비례로 보면 16.7㎝ × 17.8㎝가 옳을 듯하다.)

   고려《청자과형병》과 함께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에 있는 고려 인종(재위 1123-1146)의 왕릉에서 출토된 청자 유물 가운데 하나로 전해진다. 똑같이 생긴 다른 하나와 함께 한 쌍를 이룬 것으로 짐작되지만 용도는 확실하지 않다. 밑바닥은 틔어 있으며 일종의 4능화형대(四菱花形臺) 모양으로 제식(制式)이 규모있게 짜여 있다. 이것과 같은 모양과 질의 4능화형대 파편과 6능화형대의 파편이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 가마터 조사에서 발견되었다. 중국 송대(宋代) 월주요에서 만든 청자 가운데 이것과 같은 작은 방형대(方形臺)가 영국 옥스포드 대학 부속 애쉬모리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옅은 녹색을 띤 회청색의 반실투성(半失透性) 유약이 입혀져 있고 광택이 매우 우아하며 빙렬(氷裂)은 거의 없다. 12세기 전반기의 순청자 시대 최성기 유약의 특징과 원숙한 번조(燔造) 기술를 보여준다.

 

   (박물관에서 용도를 알 수 없다고 말한 기물(器物)이다. 중국에도 이 비슷한 용기가 있었는데, 최근의 중국의 한 전문가는 이를 여인들의 화장을 위한 용도로 쓰인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너비가 29.6cm라면 화장품을 개어 풀어 얼굴에 찍어 바르는 용기로 보기에는 크기가 거의 세수대야에 가까워 무리가 있고, 세수대야로 보기에는 물을 담을 수 없을 만큼 완만한 기울기를 가지고 있다. 16.7㎝ × 17.8㎝의 규격이라면 다소 크긴 하지만 화장 용도의 기물이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여인들의 애장용기로 보기에는 아무 문양이 없이 너무 담백하고 밋밋하다.

   박물관측은 테두리의 형태가 그 위에 다른 물건을 층층으로 쌓아올릴 수 있는 형태여서 여러 개의 합을 겹친 용기이리라 추정하나, 용기의 깊이가 합의 용도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얕고 또 고려 인종 왕릉에서 이 기물 하나만으로 출토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국립박물관 측의 크기가 사실이라면 여인들의 화장을 위한 용기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크다. 이 기물의 용도는 바로 아래의 유물 <청자음각연화모란문육각받침>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유물의 규격을 대하는 엄밀성, 여러 각도에서의 사진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박물관의 전시나 자료에서 설명이나 사진으로 용도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9. 청자음각 연화모란문 6각 받침 높이 9.6cm

 

 

   ( 높이로 미루어 상부의 직경은 7~8cm 내외일 터인데 이런 정도라면 분을 개어 쓰기에 적당한 크기이나 앞에서 동일한 형상의 기물이 화장품의 시용을 위한 용기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이것을 화장 용도의 기물로 보기에는 난점이 따른다.

   이 형태의 기물에서 상단에 패인 홈이 용도상 중요 기능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경사진 면으로 이루어진 상부의 빗면과 바닥면이 용도의 초점임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외곽을 두르고 있는 패인 홈이 없다.

   그러므로  두 사례를 아울러 종합적으로 볼 때 뚜껑이 없는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렇다면 이는 그 자체로 완결된 형태이거나 그대로 다른 것과 일습으로 쓰인 것으로 추정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라면 화분의 받침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조사에서 아래 부분이 바닥면과 같은 형태의 화분이 그 위에 놓였을 가능성 곧 실내용 화분대로 쓰였을 가능성을 타진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0. 청자투각돈(靑磁透刻墩) 보물 제416호 13세기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13세기 중반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터  생산(품으로 추정

 

 

   높이와 몸통의 지름은 각각 ① 49.5㎝, 38㎝ ② 48㎝, 38㎝ ③ 50㎝, 35㎝ ④ 48.5㎝, 34㎝이다. 경기도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만든 청자로 된 유물 4점이다. 13세기 작품으로 장식기법상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②형은 맨 윗면인 천부에 연꽃무늬를 각각 음각하였다. 몸통에는 활모양을 세로로 어긋나게 엮어 놓은 모습으로, 뚫어서 조각하는 투각문을 사용하였다. 이 뚫을무늬대 상단에는 덩굴무늬를 음각하여 돌리고, 하단에는 국화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있다. 굽다리에는 거칠고 간단한 2겹의 연꽃무늬를 음각하였다.

  ③·④형은 몸통에 큰 타원형의 고리 모양을 세로로 어긋나게 엮어 놓은 모습을 음각하였다. 상단에는 덩굴무늬를 음각하고, 하단에는 4면에 안상을 하나씩 뚫어서 조각해 놓았다. 굽다리와 맨 윗면의 장식은 ①·②형과 동일하다.

   유색은 녹청색(綠靑色)으로 전면에 고르게 칠해지지 않았으며, 굽 바닥에는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13세기 중반 전북(全北)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유천리(柳川里) 청자(靑磁) 가마터  생산(生産)품으로 추정한다. 청자투각연환문돈(靑磁透刻連環紋)으로 이름하는 것이 해당 유물의 특징을 좀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 이의 용도는 우리쪽 기록으로는 미상이지만, 중국측 서화를 보면 궁궐이나 저택 정원의 야외용 의자로 쓰이기도 하고 실내외에서 화분받침대로 쓰이기도 하였다. 의자용에는 배수용 구멍이 뚫려 있지 않고 받침대용에는 배수용 구멍이 뚫려 있는데, 필요에 따라 의자로도 화분대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화분대용 돈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은 이것 또한 기본적 용도는 옥외용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화분대가 조선조에도 백자로 만든 것이 알려진 것으로는총 8점이 국내외에 존재하는데 이는 이러한 <돈>에 의한 화분의 진열 및 관상이 전통적 방식이어서 조선조까지 계승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특히 고려시대에는 그것이 후대에 계승될 만큼 화분 수목의 감상에 있어 확립된 방식이었을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같은 추정은 옥션 경매에 출품된 두 점의 청자투각돈으로 뒷받침된다.

 

   이와 같은 모양의 화분대와 의자는 중국에도 보이지만 중국의 경우는 대리석 화분대를 포함하여 이것보다 큰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고려조 분재 감상 방식에 대한 당시의 기록이나 서화가 없지만 중국쪽 서화로 미루어 보면, 고려조에는 화분받침대와 화분을 활용한 수목들을 주로 거처에서 눈에 잘 뜨이는 처마밑과 같이 가까운 실외에 놓거나 정원이나 마당의 오가는 길목에 두고 감상했고 실내 감상이 필요한 경우 작은 화분과 화분대는 책상이나 전시용 탁자에 올려 놓고 감상하고, ‘돈’과 같은 높은 화분대의 경우 실내의 적당한 위치에 들여두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분재에 화분대가 존재하며 그 화분대가 대단히 공들여 만들어진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것은 화분대 자체가 분재수의 진열과 전시까지를 염두한 심미적 기능과 완결성을 갖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완결성을 가진 일습의 분재수들을 모아 다시 새로운 아름다움을 조합해내는 진열 방식이 중국과 한국에는 있었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 중국과 한국의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이다. 기명절지도는 자신이 가진 기물(器物)들과 화훼들을 단순히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장 아름답게 운치있게 보일 수 있도록 조합한 것인 동시에 그것을 누리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김홍도의 <포의한사도>가 그림 속의 주인공이 자신의 애장물(愛藏物)을 누리는 방식을 보여줌과 유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완상방식은 중국과 한국에는 존재하나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당시 일본도자문화의 후진성 때문일 것이다. 가지고 있지는 못하나 이를 알고는 있었던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은 그래서 도자전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고, 방법의 비윤리성을 역사적으로 안고 있으나, 그 결과 일본은 현재 세계 1위의 도자 생산국이자 수출국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300년 뒤 구한말 궁정유물 도자기의 상당수가 일본 도자기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분노와 아픔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11. 청자상감포류수금문돈(靑磁象嵌蒲柳水禽文墩) 지름 33.5X높이 41.5cm 고려시대

서울옥션81회경매(2003년 11월 18일)

 

 

   앞의 것이 투각의 아름다움과 시원스러움이 핵심이어서 남성적인 미감이 돋보인다면, 이 돈은 투각으로 부각된 화면 속에 그려진 그림과 상하단의 규칙적 문양의 세련된 여성적 아름다움이 핵심이다. 어떻게 이것이 이와 같이 온전하게 전승되고 유통될 수 있었는지 기이하면서 감사하다.

   돈의 높이가 41.5cm인데 이 높이는 현대 한국인 남자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책상용 의자의 높이이다. 위 청자투각돈의 높이는 4점 모두 50cm 내외이므로 당시 의자 높이는 일반적으로 40~50cm 높이였을 것이다.

   감상자의 눈높이는, 구한말 조선인의 평균 키가 165cm 정도라 하므로 이 경우 앉은키는 83cm 정도로 추정되고 여기에 의자 높이를 더하면 120~130cm 내외가 되므로, 의자에 앉은 의자에 앉은 상태로 110~120cm가 된다.

   분재수의 높이는, 당시와 같은 화분의 경우 대개 화분의 1~2배 정도이므로, 앞 편에서 살핀 바의 크기를 토대로 하면 24~48cm 내외였을 것이다. 여기에 돈의 높이를 더하면 진열된 전체 높이는 최소 64~ 최대 118cm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고려조의 투각돈의 높이는, 눈 아래서부터 눈높이까지 편안한 감상을 가능하게 하는, 눈높이인 것이다.

   당시는 거닐면서 감상하기도 했겠지만 중국의 서화도 우리 서화도 대개 앉은 상태에서 화병이나 화분의 식물을 감상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과 달리 누리는 감상, 편안하고 오랜 감상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오늘날의 입식 감상이 근대 이후 나타난 생산과 소비의 분리,  상품경제적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 감상자의 인격과 심리에 대한 외면, 시간에 쫓기는 소비(감상)행태를 속성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앞 편에서 살핀 중대형분의 밑지름이 28cm 내외인데 이보다 더 큰 밑지름을 가진 화분이 존재했을  가능성, 특히 돈의 지름인 33~35cm 에 해당하는 화분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서화나 고려조의 <자수분경사계도>를 보면 화병도 화분도 상하대칭적 형태의 모양이나 진열을 선호하고, 연결 부위에서 직선이나 예각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을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형상으로도 횡폭이 상당히 벌어지는 수형 혹은 합식을 선호했을 것으로 추정돤다.)

 

 

 

 

12. 청자투각환화문돈(靑磁透刻環花文墩) 지름 33x높이 40cm 고려시대

서울 옥션 경매 85회(2004년 2월 26일)

 

 

   (둥근 고리를 엮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청자투각연환화문>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역시 높이와 지름은 40cm 와 33cm여서 재론하지 않는다.

  사진상 색감이 균일하지 않고 투각이나 상단의 문양과 하단의 연판문이 다소 거친 감이 있고, 연환문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으나 청자투각돈의 경우보다 다소 거칠고 세련미가 뒤진다. 고려청자 후기의 것이 아닌가 한다.

   흥미 있는 것은 고려청자 중대형분에서 확인한 기법-횡돌대와 종돌대에 의한 화면의 분할과 이 화면에 문양이나 그림 그려넣기-이 여기서도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기법이  고려조 장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기법이며 오래도록 전승된 것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은 이 돈의 경우는 문양 자체를 투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흥미 있는 시도이나 투각 양식 자체가 가지는 섬세함과 화려함에 부응하기에는 소박한 문양이다.

 

 

 

 

13. 청자투각문돈편(靑磁透刻文墩片)      조선 15세기       도마리1호 요지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조 초기에도 청자의 생산은 이어졌고 청자투각돈의 생산도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현재 국내외에 존재하는 백자투각돈이 필자가 조사한 바로 8점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완상(거의 오늘날의 진열과 전시 개념에 해당한다) 방식이 보편적이었으며 조선조에서도 그와 같은 완상방식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도마리 1호 요지 출토 <청자투각문돈편>은 유자(儒者)들에 의해 건국된 조선 초에도 이와 같은 감상 방식이 지속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감상방식은 조선후기에까지 지속되었을 것임을 백자돈의 문양이나 제작 수준이 추정가능하게 한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심천(心泉)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