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石坡 이하응의 묵란입니다
난초 그림을 보면서
畵人難畵恨(화인난화한)하고
畵蘭難畵香(화란난화향)하네
畵香兼畵恨(화향겸화한)하니
應斷畵時腸(응단화시장)이라
사람은 그려도 한을 그리긴 어렵고
난초를 그려도 향기를 그리긴 어렵네
향기를 그린데다 한 마저 그렸으니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그대 애가 끊겼을 테지
조선 오백년사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히는 申緯(1769~1845)의 시입니다.
누군가의 난초그림을 보고
난초 그림에서 향기와 한까지 느껴지니
아! 그것을 그린 사람은 얼마나 애가 끓었을까
라고 감탄과 탄식을 토한 시입니다.
문인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송말 원초의 鄭思肖(1241~1318)의 묵란입니다.
汝是何人到此鄕
向來俯首問羲王
未有畵前開鼻孔
滿天浮動古馨香
머리 숙이고 희왕에게 물어보았지
당신이 누구냐고, 그리고 이곳에 왜 왔느냐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콧구멍을 열었지
온 하늘 가득히 떠도는 옛 향기라네.
송의 애국지사였던 그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몽골에 대한 저항의식을
뿌리 없는 난 그림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 난의 뿌리를 감싸고 있어야 할 흙을 아예 그리지 않음으로써
몽골이 '강탈한' 흙에 뿌리내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나타낸것이지요.
조선말 대원군의 묵란과 쌍벽을 이뤘던 민영익(1860/철종11년~1914)의 묵란입니다.
정사초로부터 시작된
나라잃은 선비는 난을 칠때 흙을 그리지않는다는 묵계를 따라
공중에 떠있는 뿌리를 그리되 흙을 그리지않아
을사조약 체결 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떠도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민영익의 다른 그림들입니다.
난초 사이의 여백이 없고 줄기가 가늘고 고르며 일정하고
끝이 뭉툭하여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의 묵란을 보여준 민영익은
왕실의 외척으로 태어나 20대초에 미국, 유럽을 돌며 일찍 서양문물에 눈뜨고
요직을 두루 거치지만 야심이 없고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면
처절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야망과 좌절의 삶을 살았던 대원군은
여백이 많고 섬세하면서 역동적이며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잎의 끝과 가늘고 날카로운 줄기를 통해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표현하였습니다.
추사 김정희 마저 난초 만큼은 대원군이 낫다고 극찬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세계를 보여줍니다.
대원군의 묵란들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 小湖 金應元(1855~1921)의 묵란입니다.
대원군에게 난을 부탁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 대신 그려주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석파의 그림을 많이 닮았으나 조금 더 서정적인 느낌의 작품세계를 보입니다.
춘란은 미인 같아서
캐지 않고 스스로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네
때때로 바람에 향기 날리지만
쑥대 속에 깊이 묻혀 보이지 않네
그림으로 그 참모습을 그려
굴원의 이소를 도우려 하였는데,
대해보니 굴원 같아
함부로 장식으로 쓰지 못하네
고매한 난은 시냇물 깊은 가에 생기는데
향기는 깊은 숲에 가득하네.
캐어서 드리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할꼬.
해는 저물어 그저 손에 가득할 뿐
배회하며 근심만 깊어지네
슬퍼 탄식하며 난을 엮어차고
언덕에서 거문고만 거듭 연주 하노라
踈花瘦葉蘇根荒, 片石依前伴古香.
幽谷埋春三十載, 等閒風送到君傍.
성근 꽃, 야윈 잎, 이끼 뿌리 거칠어도, 한조각 돌에 의지해 옛향기와 짝한다.
그윽한 계곡에 봄을 묻어둔지 서른 해, 무심한 바람결에 보내노니 그대 곁에 이르기를.
峭壁一千尺 벼랑은 일천척이요
蘭花在空壁 난 꽃은 벼랑 틈에 있고
下有采樵童 그 밑에 나무하는 초동이 있는데
伸手折不得 손을 뻗어 꺾으려 하여도 닿지가 않는구나!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그림으로 추정되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입니다.
상단의 첫 제발속의 <不二>서체가 왠지 낯이 익습니다.^^
우측은 발문을 지운 상태의 가상도입니다.
상단의 첫 제발의 해석입니다
‘난초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그렸더니 하늘의 본성이 드러났네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일세
만약 누군가 억지로 (그림을)요구한다면,
마땅히 유마거사의 말 없는 대답으로 거절하리라’
추사는 자신을 대승불교의 대표적 성자로서 부처에 필적한다는 유마 거사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진리를 묻는 질문에 아무 말도 않음으로써 대답했다는 유마의 불이선 경지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화자찬이라기 보다는 더이상 말이나 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의 경지를
말하려 한것 같습니다.
전통의 난초그림에서는
잎새가 꺽이고 구부러짐과 앞뒷면이 반전되는 변화가 반복되는 전절(轉折),
잎새의 폭이 풍성하고 수척해지는 변화가 반복되는 비수(肥瘦)의 리듬감을 중시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 법식들은 보이지 않고 잎새는 턱턱 끊어지거나 끝부분으로 가면서 작은 떨림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냥 힘주어 직 그은 것 같은 이 전위적 화법의 해답을 첫 제발 오른쪽의 두번째 제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초서와 예서,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당대 청나라에서는 옛 글씨체풍으로 그림 그리는 양주 화파라는 전위 작가그룹의 그림이 유행했는데,
그 영향을 받은 추사는 그 경지를 더욱 극한까지 밀어올려 표현한것으로 보입니다.
좌측의 세번째 제발의 내용은
‘애당초 달준이 주려고 아무렇게나 그린 것이다. 다만 이런 그림은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추사는 1853년 반대파의 탄핵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서
달준이라는 평민 출신의 떠꺼머리 총각을 만난 뒤
시동처럼 부렸고 먹을 갈아준 탓에 ‘먹동이’라고도 불렀는데
귀양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은거할 때도 달준이는 청관산옥으로도 불리웠던 초당에서 추사를 계속 모셨고,
<불이선란도>는 그 시절 우연히 건네준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문제는 그림이 절세 걸작임을 알아본 서각가 소산 오규일(추사의 측근)이 이를 알아챘고
급기야 소산은 그림을 달준에게서 뺏고 그림에 별개의 제발을 해달라고 간청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세째 제발 옆에 조그만 글씨로 익살스런 제발이 또 끼어듭니다.
“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정말 가소롭고 우습구나.”
제 마음속에 들어온
첫번째 제발속의 문구
폐문멱멱심심처(閉門覓覓尋尋處)
요즘같은 세상에
누군가 폐문하고 들어앉아
멱멱(찾을 멱)하고
심심(찾을 심)할곳은
과연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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