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나무야 자귀나무야
김종제
산 깊은 곳에 숨어 살다가
누구 보라고
강변으로 들판으로
어느 마당 넓은 뜨락까지 내려온
자귀나무야 자귀나무야
예까지 무엇하러 왔니, 왜 왔니
봄꽃이 지기 무섭게
초록 잎새 무성히 매어 달고
가장 높은 왕의 자리에
합환(合歡)의 비단 이불 펴 놓은
자귀나무야 자귀나무야
임을 만나러 왔구나, 올 해도 왔구나
별 뜨고 달 밝은 밤에
새털처럼 부드러운 꽃잎 위로
사랑하는 사람을 눕히면
하늘 향해 손을 벌린 잎사귀들
문을 닫아 주는데
자귀나무야 자귀나무야
무슨 말을 할 거니, 마음만 줄 거니
밤은 더욱 깊어지고
새벽이 더욱 가까워지면
불현듯 입속에서 천둥이 치고
눈빛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소나기가 쏟아져 살갗을 때리는구나
자귀나무야 자귀나무야
하룻밤 운우지정 나눈 사랑으로
온몸이 축축하게 물에 젖었구나
어느새 열매 맺혀
바람따라 풍경 소리를 내는구나
미움 하나 한결같이 모르는
자귀나무야 자귀나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