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모음/꽃, 나무의 詩

보리수나무 아래로

必 霧 2010. 6. 1. 11:52

 

 

 

 

 

 

 

보리수나무 아래로

                          

김 승 희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나무 아래 휘어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
  청춘을 중퇴한 듯해.
  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듯한
  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그런 위태로운 아편길 위에서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
  정말이야, 꼭 미친 듯이 뛰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어.

  그래서 난 새해같은 것이 오면
  더욱 피로해지는 것 같아.
  그런 시간에는 문득 멈춰서서
  자신을 봐야 하니까.
  누구의 삶에나 실수는 있는 법이고
  갑자기 자신을 본다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지.

  「쓰러질 것 같아요」
  「용기를 내」
  「아직도 멀었을까?……」
  쓰러질 것 같아서
  시간의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
  그래, 그래, 그런 착한 깨달음이 오지.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
  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보리수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
  모든 길이란, 아마도, 나,
  자신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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